Last Updated on 2026/07/23 by Tomylove
제1부. 한 장의 사진이 내게 던진 질문
— 마이클 케냐 ‘솔섬’ 논란과 창작자의 권리에 대한 첫 번째 고민
본 포스팅은 2014년 세간을 뜨겁게 달구었던 마이클 케냐의 ‘솔섬’ 사진 저작권 논란을 시작으로, 인공지능(AI) 시대에 이르기까지 ‘창작의 권리와 창의성의 본질’을 깊이 있게 성찰한 3부작 연재의 첫 번째 글입니다.
창의성은 어디에서 시작될까.
이 질문은 내게 하루아침에 찾아온 것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한 장의 사진이 내게 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 사이 세상은 크게 변했다.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AI가 창작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모방하는지를 두고 논쟁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논쟁의 본질이 십여 년 전 내가 고민했던 질문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창의성은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보호하려 하는가.
이 글은 그 질문을 따라간 기록이다.
2014년 '솔섬' 저작권 소송과 첫 번째 고민
2014년, 사진계와 법조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세계적인 흑백 사진작가 마이클 케냐(Michael Kenna)의 ‘솔섬(Pine Trees)’ 사진과 대한항공 광고 사진을 둘러싼 저작권 소송이었다.

( 문제가 된 마이클 케냐 Michael Kenna pine trees 작품 스틸 )
당시 나는 법률가도 아니었고 유명한 사진가도 아니었다.
그저 사진을 사랑하는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 사건에 마음이 갔다.
사실 내 관심은 소송 자체보다도 질문에 있었다.
‘누구나 찍을 수 있는 풍경이 과연 한 사람의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지금 생각하면 그 질문은 단순한 저작권 문제가 아니라 창의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우연과 모방의 경계 — 첫 출사의 기억
사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기초 교육을 마치고 첫 출사를 다녀온 뒤, 서로의 사진을 평가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한 장의 사진을 두고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 유명 사진작가의 작품을 보고 찍은 것 아닌가요?”
순간 당황했다.
나는 그 작품을 본 적도 없었고, 그 작가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경험은 전혀 다른 의미로 남았다.
세상에는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같은 풍경을 보고 비슷한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어디부터가 모방일까.
그 질문은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았다.

[ 비의 추상 (Abstract of Rain & Light), phoresto 스틸 ]
처음에는 답이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바다도, 산도, 나무도, 구름도, 석양도, 모두가 함께 바라보는 세상이다.
누군가 먼저 사진을 찍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그 풍경을 촬영할 자유까지 제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사진을 계속할수록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사진이란 언어 — 풍경이 아닌 시선을 담다
사진은 카메라를 배우는 일이 아니었다.
시선을 배우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셀 수 없이 많다.
우리나라에만 해도 수천 개의 섬이 있고, 이름 없는 산과 들, 오래된 골목과 작은 강,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 주는 나무들이 있다.
사진가라면 누구나 하루에도 수백 장의 사진을 찍는다.
1년이면 수만 장의 사진을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작품으로 남는 것은 몇 장 되지 않는다.
왜일까.
사진은 찍는 기술보다 선택하는 과정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을 담을 것인가, 무엇을 버릴 것인가.
어떤 장면이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말해 줄 것인가.
그 긴 고민 끝에 비로소 한 장의 사진이 작품이 된다.
사진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아니라, 셔터를 누르기 전과 누른 뒤의 모든 시간이 함께 만드는 예술이다.

[ 호기심 (Curiosity), phoresto 스틸 ]
그 무렵부터 나는 사진을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말과 글이 생각을 전달하는 언어라면, 사진은 시선을 전달하는 언어다.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사람마다 다른 문장을 쓰듯, 같은 풍경을 바라보아도 사람마다 다른 작품을 만든다.
누군가는 나무를 찍고, 누군가는 빛을 찍으며, 누군가는 침묵을 찍는다.
풍경은 같지만 작품은 같지 않다.
차이는 풍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안드레아 구르스키 〈99 Cent II〉가 던진 파격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안드레아 구르스키의 작품 〈99 Cent II〉를 다시 보게 되었다.

[ 99Cent Ⅱ, Diptychon by Andreas Gursky (2001), 출처 : 국내신문사 ]
처음에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평범한 할인매장의 진열대를 찍은 사진이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왜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을까.
왜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었을까.
오랫동안 바라본 끝에 나는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작품이 된 것은 진열대가 아니었다.
그 진열대를 작품으로 바라본 시선이었다.
세상은 늘 그곳에 있었지만, 아무도 그곳에서 예술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발견했고, 그 발견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다.
그 순간 평범한 공간은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창의성의 재정의 — 존재하는 것 속에서의 '발견'
나는 점점 창의성을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창의성이란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것을 배우며 살아간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언어를 배우고, 다른 사람의 음악을 들으며, 다른 사람의 그림을 감상한다.
사진가 역시 수많은 작품을 공부하며 자신의 시선을 키운다.
완전히 새로운 것만을 창의성이라고 부른다면, 인간의 거의 모든 창작은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오히려 창의성이란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 속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에 가깝다.
평범한 풍경을 작품으로 바라보는 능력.
익숙한 일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하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능력.
나는 그것이 창작의 시작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믿음은 나를 다시 마이클 케냐의 ‘솔섬’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저작권 분쟁으로 보였던 사건이 이제는 전혀 다른 질문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호하려 하는가.
풍경일까, 촬영 장소일까.
아니면 그 풍경을 처음으로 작품의 언어로 바꾸어 낸 한 사람의 시선일까.
십여 년 전에는 그 답을 쉽게 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좋은 질문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질문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시대를 만나 더 깊어진다.
마이클 케냐의 ‘솔섬’이 내게 그랬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인공지능이라는 전혀 새로운 시대를 만나 다시 내 앞에 서게 되었다.
(제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