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Updated on 2026/07/23 by Tomylove
제2부. 법은 옳았다. 그러나 질문은 남았다
— 저작권과 창의성 사이에서 다시 바라본 사진 한 장의 의미
제1부의 ‘시선의 발견’에 이어, 제2부에서는 마이클 케냐 솔섬 판결이 가지는 법리적 타당성과 함께 법이 다 담지 못하는 ‘창작자의 양심과 예술적 가치’를 심층 분석합니다.
오랫동안 나는 마이클 케냐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가 처음 발견한 풍경이었고, 그가 처음 예술의 언어로 세상에 소개한 장면이었으며, 그의 사진 한 장이 이름조차 없던 작은 섬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창작자의 노력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당시 법원의 판결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조금씩 다른 시각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게 되었다.
판결문을 다시 읽고, 관련 자료를 다시 찾아보고, 무엇보다 사진을 계속하면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법원은 창작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법원이 지키려 했던 것은 창작의 자유였다.
법원의 논리 — 왜 자연물에 독점권을 줄 수 없는가
법원의 핵심 논리는 명확했다.
자연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바다는 누구나 바라볼 수 있고, 산도 누구나 오를 수 있으며, 같은 해가 떠오르고, 같은 바람이 분다.
만약 특정한 촬영 위치나 구도 자체에 독점적인 권리를 인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군가 먼저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풍경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게 된다.
창작자를 보호하려던 법이 오히려 또 다른 창작자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 지리산의 봄(Spring of Jirisan) I, phoresto 스틸 ]
그 점에서 법원의 판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사회 전체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결론을 존중한다.
하지만 법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내 질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법은 무엇을 보호하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까지 존중해야 하는가.
이 둘은 같은 질문이 아니다.
배병우의 '소나무'와 안드레아 구르스키가 보여준 가치
나는 다시 안드레아 구르스키의 〈99 Cent II〉를 떠올렸다.
평범한 할인매장, 누구나 드나드는 공간, 누구나 찍을 수 있는 풍경.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그렇게 보지는 않았다.
그는 보았다.
그 차이는 카메라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의 시선이 만든 것이다.

[ 강(River), phoresto 스틸 ]
배병우의 소나무도 마찬가지다.
소나무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나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시선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점점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1/100초 뒤에 숨은 긴 시간 — 대법원 판례의 저작물 요건
사진을 하다 보면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같은 장소에서 함께 출사를 나가도 결과물은 모두 다르다.
같은 시간, 같은 빛, 같은 카메라를 들고 있어도, 사람마다 멈추는 순간이 다르고, 프레임이 다르며, 무엇을 중요하게 보는지가 다르다.
결국 사진은 풍경을 찍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에 마음을 빼앗겼는지를 기록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대한민국 대법원 사진저작물 성립요건 판례 (98다43366)
“사진저작물은 피사체의 선정, 구도의 설정, 빛의 방향과 양의 조절, 카메라 각도의 설정, 셔터의 속도, 셔터찬스의 포착, 기타 촬영방법, 현상 및 인화 등의 과정에서 촬영자의 개성과 창조성이 인정되어야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저작물에 해당한다.”
그래서 나는 작품성이 단순히 셔터를 누르는 기술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사체를 선택하는 안목, 구도와 빛을 읽는 감각, 수많은 사진 가운데 단 한 장을 남기기 위해 버리는 판단, 그리고 그 사진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 세상과 대화하려는 의지.
그 모든 시간이 쌓여 작품이 된다.
사진 한 장은 셔터를 누르는 1/100초보다 훨씬 긴 시간의 결과다.

[ 지리산의 봄(Spring of Jirisan) II, phoresto 스틸 ]
법과 양심 사이 — 모방인가 새로운 표현인가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만약 어떤 사진가가 세계적인 작품을 보고, 같은 장소를 찾아가, 같은 계절을 기다리고, 같은 시간에, 같은 구도를 흉내 내며, 가능한 한 비슷한 분위기의 사진을 만들어 판매한다면, 그것도 새로운 창작일까.
법은 일정한 기준 아래에서 그것을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법과는 별개로, 창작자의 양심이라는 또 다른 기준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법전에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예술은 오래전부터 그 기준 위에서도 성장해 왔다.
나는 지금도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나 자유롭게 찍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자유가 있어야 새로운 시선도 태어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작품이 가진 명성과 감동, 독창성을 최대한 빌려 자신의 작품으로 시장에 내놓으려 한다면, 나는 그 지점에서 창작과 모방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법적으로 허용되는 것과 예술적으로 존경받는 것은 언제나 같은 의미가 아니다.
예술은 법보다 조금 더 엄격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가 있다.
나는 그 질문이 건강한 창작 문화를 만든다고 믿는다.
그렇게 십여 년을 생각한 끝에, 나는 처음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2014년의 나는 쉽게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2026년의 나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법원의 판결도 이해하고, 마이클 케냐의 아쉬움도 이해하며, 같은 장소를 찍고 싶어 하는 사진가의 자유도 이해한다. 모두가 어느 정도는 옳다.
그러나 그 모든 주장 속에서도 끝내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좋은 작품은 풍경이 아니라 시선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시선은 법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인간적인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제3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