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Updated on 2026/07/23 by Tomylove
제3부. 창의성은 누구의 것인가
— AI 시대, 인간의 창작과 새로운 질문
1부의 ‘시선의 발견’, 2부의 ‘법과 양심의 경계’에 이어, 마지막 3부에서는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이하여 ‘AI 학습과 창작의 본질, 그리고 인간의 양심’에 대한 최종적 결론을 제시합니다.
마이클 케냐의 ‘솔섬’ 사건이 세상에 큰 논쟁을 남긴 지 어느덧 십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세상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변했다.
필름은 디지털이 되었고, 스마트폰은 누구나 사진가가 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거대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인공지능.
AI는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며, 소설을 쓰고, 사진을 생성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래된 질문 하나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AI는 창작하는가.”
오래된 질문의 부활 — AI 학습과 저작권 논쟁
이 질문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상하리만큼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 마이클 케냐의 ‘솔섬’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당시의 논쟁도 결국 같은 질문이었다.
창작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우리는 무엇을 보호하려 하는가.
그 질문이 이제 AI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AI 학습과 저작권을 둘러싼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허락 없이 AI의 학습에 이용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AI 개발자들은 인간 역시 다른 사람의 작품을 배우며 성장한다고 말한다.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 논쟁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를 먼저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의 배움과 AI의 학습 — 학습 그 자체는 죄가 없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배운다.
부모의 말을 듣고 언어를 익히고, 수천 권의 책을 읽고, 수많은 그림을 감상하며, 선배 음악가들의 작품을 연구한다.
사진가 역시 위대한 사진들을 끊임없이 바라본다.
구도를 배우고, 빛을 배우며, 어떤 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배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모든 배움을 저작권 침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배움은 창작을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AI의 학습도 이 지점에서는 인간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AI 역시 수많은 작품 속에서 패턴을 학습하고, 그 관계를 이해하며,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낸다.
만약 학습 그 자체만으로 저작권 침해라고 단정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창작 과정도 같은 기준으로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에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학습이라는 행위 자체보다, 그 학습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를 더 중요하게 본다.
도구와 주체 — AI 시대에 묻는 창작자의 책임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생긴다.
AI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 특정 작가의 작품과 실질적으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아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책임을 AI라는 도구 자체에 묻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카메라는 스스로 사진을 찍지 않고, 붓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며, 피아노는 스스로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AI 역시 스스로 무엇을 만들겠다고 결정하지 않는다.

[ 1부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 기술이 아닌 ‘시선’이 담긴 순간 (phoresto 스틸) ]
언제나 누군가의 의도와 지시, 선택이 개입한다.
결국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책임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다.
이 점에서 나는 마이클 케냐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을 가능한 한 비슷하게 재현하여 그 명성과 분위기를 이용해 상업적으로 판매하려 한다면, 나는 그것을 창작보다 모방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AI가 생성한 결과물이 기존 작품의 표현을 실질적으로 대체하거나, 특정 작가의 독창성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다면 그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수많은 학습을 바탕으로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냈고, 그 결과가 독자적인 표현으로 평가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무조건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 기준은 인간에게도, AI에게도 동일해야 한다.
창의성의 본질 — 무에서의 창조가 아닌 관계의 발견
십여 년 전 나는 창의성이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인간의 모든 창작은 과거와의 대화 위에서 이루어진다.
새로운 음악도 이전의 음악을 듣지 않고는 태어나기 어렵고, 새로운 문학도 오래된 문장을 읽지 않고는 성장하기 어려우며, 새로운 철학도 이전의 사상을 딛고 나아간다.
완전히 고립된 창작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창작은 단절이 아니라 축적이며, 모방이 아니라 변형이고, 복제가 아니라 재해석이다.
그래서 나는 창의성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 창의성(Creativity)의 진정한 정의
“창의성이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경험과 지식, 문화와 기억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표현으로 다시 세상에 내놓는 능력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마이클 케냐는 솔섬을 만든 사람이 아니다. 그는 솔섬을 발견한 사람도 아니다.
솔섬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풍경에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그것을 한 장의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나는 그 점에서 그의 창의성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동시에 법원의 판단도 이해한다. 풍경은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십여 년 동안 나는 이 두 생각 사이를 오가며 수없이 고민했다.
어쩌면 정답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법은 사회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질서를 세우고, 예술은 그보다 더 높은 기준을 스스로에게 요구하며, 인간의 양심은 때때로 법보다 먼저 창작자를 존중한다.
나는 이 세 가지가 함께 존재할 때 건강한 창작 문화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에필로그 — 풍경은 누구의 것도 아니듯이

[ 세상을 향한 변함없는 호기심 — 창의성이 태어나는 출발점 (phoresto 스틸) ]
12년 전 나는 한 장의 사진을 보며 질문했다.
“저 풍경은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창의성은 누구의 것인가.”
이제 나는 조금 다른 답을 찾게 되었다.
풍경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빛도 누구의 것도 아니다.
자연도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인간이 가진 기억과 경험 역시 완전히 자신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이전 세대가 남긴 수많은 흔적 위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창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남들이 지나친 것을 바라보고, 익숙한 것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고, 수많은 경험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마이클 케냐가 발견한 것은 솔섬이라는 섬이 아니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한 순간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창작이었다.
AI 시대가 와도 이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많은 것을 학습했는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배움을 통해 무엇을 새롭게 바라보고, 어떤 의미를 세상에 던지는가이다.
결국 창의성은 기술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카메라에서도, 붓에서도, 인공지능에서도 태어나지 않는다.
창의성은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한 존재의 시선에서 태어난다.
📌 [마이클 케냐 솔섬 & AI 시대 창의성] 3부작 전체 읽기
- 제1부. 한 장의 사진이 내게 던진 질문 — 마이클 케냐 ‘솔섬’ 논란과 창작자의 권리
- 제2부. 법은 옳았다. 그러나 질문은 남았다 — 저작권과 창의성 사이에서
- 제3부. 창의성은 누구의 것인가 — AI 시대, 인간의 창작과 새로운 질문 (현재글)